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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군 ‘탁영종택’]
곧은 선비의 절개와 지조 지킨 청도 명문가의 종택

경북 청도군 화양읍 백곡마을에 있는 탁영종택은 조선 연산군때 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입은 무오사화의 주인공 김일손(金馹孫)의 종택이다. 임진왜란때 소실되는 등 몇차례 개축을 거치면서 당초의 원형이 많이 변형됐지만, 선비로서의 소신을 지킨 김일손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문화재로 지정된 집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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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의 고조부때 청도에 터 잡아

경북 청도(淸道)는 옛 이서국(伊西國)이 있던 곳이다. 이서국은 주변의 부족국가들을 연합해 만든 국가로 지금도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고고유적이 남아 있다. 이서국은 한때 신라의 금성을 공격해 위기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부족국가였으나, 결국에는 신라에 복속돼 하나의 군이 됐다. 그후 여러차례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 안채 뒤쪽에 담장을 두르고 별도로 만든 종택의 사당. 자계서원의 사액과 함께 공불천위의 부조묘가 됐다.

 

화양읍 토평리의 백곡마을은 과거 이서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곳에 왕성을 쌓았는데, 높지 않은 산등성이들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다. 낮은 곳은 인위적으로 토성을 쌓았다. ‘백곡(柏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원래 이곳에 잣나무가 많아 잣실이라고 부른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같은 문헌기록들에 비추어 백곡마을은 청도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탁영종택의 전경. 마을 가운데 종택을 중심으로 지손들의 집이 주변에 분포해 있다.

 

탁영종택은 바로 이 백곡마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동··북 삼면이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터진 소쿠리 형상을 하고 있다. 야산 넘어 서쪽에는 대곡천이 흐르는데, 이 내()가 마을 남서쪽에서 청도천과 합류해 흐른다. 마을과 청도천 사이에는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백곡마을이 유명한 것은 옛 이서국의 왕성이 있던 곳이라는 점외에도 청도를 대표하는 명문가인 탁영(濯纓) 김일손의 종택이 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본관이 김해로, 군청의 기록에 따르면 이 마을은 김해 김씨 삼현파의 집성촌이라고 한다. 탁영 김일손이 태어난 곳은 청도군 북상면 운계리이다.

 


안채 앞으로 장독대가 놓여 있는 모습이 옛 집의 정취를 자아낸다.

 

탁영 집안이 청도에 터를 잡은 것은 그의 고조부로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을 지낸 김항(金伉)때였다고 한다. 탁영의 조카인 김대유(金大有)가 쓴 탁영연보에 따르면 김항이 청도 운계리(雲溪里)를 지나다가 산수의 맑음이 좋아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친 남계(南溪) 김맹(金孟)때 백곡으로 들어왔다. 마을의 중앙에 탁영종택이 남향으로 자리잡았고, 이 집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지손들의 집이 분포해 있다.

 

탁영종택의 대문채. 종가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조의제문 사초에 올린 무오사화의 중심인물

탁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산군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문제가 돼 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입은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당사자가 바로 탁영이기 때문이다. 조의제문이란 중국 진나라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을 다룬 것으로, 단종이 폐위돼 사사된 것을 비유한 내용이다.

 

조의제문을 쓴 이는 당시 사림파(士林派)를 이끌었던 김종직(金宗直)이다. 김종직을 필두로 한 신진사림파들은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탁영은 바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여기에다 훈구파로 전라감사였던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국상때 근신하지 않고 기생들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내용 등을 사초에 함께 올린 것이 문제가 됐다.

 

안채의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작은 담으로 구분해 놓았다.

 

이 일은 그렇잖아도 신진 사림세력과 대립각을 이루던 기성세력인 훈구파간에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성종때에는 신진사류를 중용한 임금 때문에 반격을 꾀하지 못하다가 연산군때에 들어 기회를 잡은 셈이다. 훈구파의 대대적인 반격이 전개되면서 신진 사림들이 대거 참화로 내몰렸다.

당시 훈구파들은 유자광(柳子光)의 상소를 기회로 탁영 등을 심문한 끝에 김종직이 교사한 것으로 최종 결론지었다. 이에따라 김종직은 부관참시하고, 탁영을 비롯한 주요 사림들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나머지 사림들도 곤장을 맞고 관노로 보내지거나 귀양을 가는 형벌에 처해졌다.

 

삼유헌 전경. 건물앞 마당에 작은 정원이 만들었다.

 

탁영은 열일곱살 때 밀양에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면서 김종직의 문인이 됐다. 1486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뒤 예문관에 등용돼 서장관 등으로 중국에도 몇차례 다녀왔다.

 

그는 이후에도 주서(注書)부수찬, 장령, 정언, 이조좌랑, 헌납 등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그가 있던 보직은 주로 언관(言官)이었고, 특히 훈구파 학자와 대신들의 비행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그가 춘추관의 헌납이나 사관 등으로 일할 때도 훈구파의 비행을 있는 그대로 적어 훈구파들의 원한을 샀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자고 일어나면 벼슬이 올라 있다고 일컬을 만큼 젊은 나이에 요직을 맡아 중앙정계에서 활동했다. 그 스스로 세상에서는 청선(淸選)이라 말하지만, 나는 전하의 은총이 되레 두려울 뿐이다고 밝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수없이 사직하고 귀향을 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자계서원 전경. 탁영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당초 이름은 운계정사였지만 탁영이 참화를 당할 때 앞의 개울에 붉은 물이 흘러 자계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종때 사액서원이 됐다.

 

 

영남 사림의 정통 학맥 이어온 명문가

탁영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가 사장(詞章)에 능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조선시대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이 쓴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계운(季雲, 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의 명사 50인에 대해 쓴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같았다. 애석하도다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과격하다는 비판도 내놓았다.

 

랑채와 이어진 곳간채. 곳간채가 이어지면서 길쭉한 모양이 됐다. 사랑채에는 유의당(維義堂)’이라는 당호와 함께 탁영세가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후대의 평판들을 살펴보면 탁영이 학자로서, 또 언관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후세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것은 바로 그의 곧은 지조와 절개때문일 터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인물이다. 이런 그의 기개는 그의 가계에서 비롯된 측면도 없지 않은 듯하다.

그의 고조부 김항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던 인물이다. 또 그의 조부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수학했고, 효성이 지극해 절효(節孝)라 일컬어졌던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이다. 그의 부친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에에 사사했다. 형들도 모두 과거에 급제해 당대에도 명문가로 알려진 집안이었다. 영남 사림의 정통학맥을 이어온 집안인 셈이다.

 

탁영선생 숭모사업회 현판기가 걸려 있다.

 

한국인물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김극일은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성한 뒤 장인의 간곡한 사관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는 등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 아들과 손자들의 훈육에도 정성을 기울여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등 명문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탁영의 가문인 김해 김씨 삼현파의 삼현은 바로 탁영의 조부인 김극일과 김일손, 그리고 탁영의 조카인 김대유를 일컫는다. 김대유는 탁영이 화를 당할 때 탁영의 형인 아버지와 함께 남원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탁영종가의 맥을 잇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탁영은 중종반정을 통해 복권됐고, 중종때 직제학(直提學), 현종때 도승지(都承旨), 순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각각 추증됐다. 1518년에는 청도의 후학 유생들이 탁영이 공부하던 운계정사 터에 자계사(紫溪祠)를 세웠고, 1578년 자계서원으로 중건했다. 1661년에는 사액서원이 됐다. 1835년에는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행랑채 한쪽에 뒤주가 있다

2 사랑채 작은 방 앞에 작은 퇴가 놓여 있다.

 

 

정면보다 측면이 긴 특이한 사랑채

현재 탁영종택은 여러차례 개축이 된 상태다. 더욱이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문적 등 문화재들이 분실되기도 하는 등의 이유로 방문앞에 유리창을 덧대는 등 당초 집의 모습과는 달리 변형이 많이 가해졌다. 그런 점에서 건축적으로는 문화재적 가치가 다소 미흡한 점이 있지만, 탁영이라는 인물의 역사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자계서원을 중건하면서 백곡의 종택에도 부조묘를 건립한 것으로 돼 있다. 임진왜란때 소실됐다가 현종2년에 자계서원이 사액서원이 되면서 종택의 사당도 공불천위(公不遷位)가 됐다. 1844년에 후손이 재건했고, 194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모각. 탁영의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탁영이 연주하던 보물로 지정된 거문고와 성종이 하사했다는 벼루 등 주요 유물은 대구박물관과 청도박물관 등에 위탁해 보관하고 있다.

 

종택은 크게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안쪽에 안채가 자리잡고 있고, 마당앞으로 장독대가 놓였다. 안채 옆 뒤쪽으로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 앞으로 오른쪽으로 삼유헌(三唯軒)이 있고, 삼유헌과 마주해 사랑채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적 모습으로는 사랑채의 구조가 다소 특이하다.

 

사랑채는 정면2, 측면 6칸으로 정면보다 측면이 긴 형상이다. 부엌을 중심으로 사랑채 부분과 행랑 및 곳간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측면으로 길어진 것이 바로 이 행랑 및 곳간부분이 이어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부분은 가운데 작은 대청을 중심으로 사랑공간이 나뉘어져 있는데, 앞쪽으로는 마루공간과 방이 놓였다.

 

사랑채 앞에는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이곳에는 탁영종가와 관련된 교지나 문적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취재를 하던 날 마침 관리인이 집을 비워 내부를 살펴보지 못했다. 탁영 김일손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종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좀더 체계적인 복원과 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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