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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우일각]
강화도의 대지주가 건립한 99칸 규모의 근대한옥

우일각(羽日閣)은 그간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집이다. 일제때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99칸의 규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한옥의 변화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집이다. 솟을삼문 옆에 늘어선 대문채와 복도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채나눔을 한 본채, 사랑채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별채 등 규모도 규모려니와 공간구성 양식도 특이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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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각 안채 뒤뜰에 있는 별채의 정자. 사방에 유리문을 달아 두었다. 창호를 열면 바깥 경관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절로 들어온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곳이다. 고려때 몽고침략에 항쟁하기 위해 수도를 옮겨오기도 했던 곳이고, 조선시대 들어서도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의 굴욕을 겪은 것도 강화도가 점령된 때문이다. 구한말에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등 외세의 침략을 온 몸으로 겪었던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우일각 전경

 

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단군전설의 신화가 묻혀 있는 참성단(塹星壇)도 이곳 마니산에 자리잡고 있다.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아올린 단이라고 한다. 또한 강화도에는 지금도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곳 강화도의 길상면(吉祥面) 또한 단군설화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바로 삼랑성(三郞城)이 그곳이다. 둘레 약 1㎞인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성벽은 거친 할석으로 축조됐으며,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바로 이곳에 있다.

 

 

▲우일각의 솟을대문. 대문의 위용만으로도 집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인천광역시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길상면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길상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임금에게 진상하던 약쑥이 나던 곳이기도 한데다 향탄(香炭)을 공급하고, 좋은 말을 기르는 목장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이곳에는 좋은 행운이 깃든다고 해서 ‘길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밖에서 바라본 우일각 전경. 독지가의 손에 의해 보수 및 복원을 거쳐 99칸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입해 보수 및 복원

길상면에는 삼랑성외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한옥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과 사제관도 남아 있고, 조선시대 방어를 위해 쌓았던 초지진(草芝鎭)도 남아 있다. 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전승비도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묘도 있다.

 

길상면에서도 온수리(溫水里)는 그 지명처럼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온수리에 일제때 건축한 99칸 대규모 저택이 있다. 이 집은 조선시대 양식의 민가로, 99칸의 규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집중의 하나다. 특히 당초 지었던 원형 거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집을 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안동과 봉화, 영주 등 경북지방과 녹우당 등 호남 일부지역뿐이다.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 담장 넝쿨사이로 여백을 남겨 둔 것이나 사이사이에 글자를 새겨넣은 것이 보인다. 담장에 새긴 글자는 교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주인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집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어놓았다. 이 땅을 사려던 이는 넓은 땅을 활용해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한 기업체의 경영자가 우리 전통가옥을 보존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집과 관련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에는 99칸 규모의 집이 모두 3채였다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남은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한 업체관계자에 따르면 집을 구입한 이후 그간 40억원을 들여 이 집을 보수 및 복원했다. 지금도 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매년 2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안채 앞으로 구획된 담장의 문양과 글씨. 담장의 축조수법이나 문양이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우일각이 당초 지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집을 구입한 이의 노력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을 구입한 이후 업체측에서는 전통가옥을 테마로 한 파크설립 구상도 했다. 한동안은 체험숙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 집은 그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이 집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시청을 통해 집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가옥이라는 점에서 그닥 중요성을 높게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문간채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 당초 중문옆으로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근대건축으로서 우일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전통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실용적인 면이 가미된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윤보선 대통령 가옥이나 가회동 등의 한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 양식(洋式)의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실로 절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실용적인 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제 감점기 중기 이전 까지의 전통가옥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네 한옥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후기의 전통가옥들은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인 양식이 많이 가미되고 있다.

 

 

▲문간채에서 사랑채로 바로 출입할 수 있는 일각문도 설치돼 있다. 안채쪽으로도 부엌 뒤쪽의 장독대로 바로 이어지는 일각문이 있다.

 

 

집을 지은 강화 거부와 관련된 이야기들

우일각을 지은 이는 김영백(金永伯)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부’라는 것외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924년 8월에 발행된 잡지 ‘개벽’과 1998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그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개벽’에 나온 내용은 ‘을인(乙人)’이라는 필자가 강화도를 답사한 내용을 기록한 ‘강도답사기(江都踏査記)’에 나온 것이다. ‘강도’란 강화도의 옛 지명이다. 여기에는 강화도의 특성이나 산업, 그리고 손돌목 등 강화도의 내력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강화의 2대 명물을 소개하고 있다.

 

‘군내에서 600석 이상 추수하는 부자가 50여호나 되어도 사회사업이라면 모두 머리를 흔드는데 그중에서도 길상면 김영백군 부부가 보통학교 건축비로 363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명물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강화도내에서 상당한 거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 전경. 가운데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을 포함한 왼쪽부분이 안채 공간이고, 오른쪽은 복도를 중심으로 사랑채 공간이 나뉘어진다.

 

이규태 코너에 소개된 이야기는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거부가 됐는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김영백이라는 거부가 있었다. 한말까지 대대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그는 어느날 헛간을 짓고자 뒷 둔덕을 파내리다가 괭이끝에 쇠붙이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마한 녹슨 솥이 묻혀 있어 이를 파내 뚜껑을 열어보니 주먹만한 금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안채 뒤쪽의 별채 정자. 뜰에서 정자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이 횡재 소문을 듣고 강화유수가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방을 붙여 금괴를 묻은 장본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김영백에게 불로소득의 10분의 1인 십일세만 물고 그 금덩이들을 차지하게 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울의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피난지였다. 국난중에 모아 두었던 금덩이를 갖고 강화에 피난온 누군가가 몰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피난온 상류층이 일가 몰살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금괴를 묻어둔 은밀한 장소가 소재불명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안채 대청. 안방과 건넌방 등의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이는 일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다.

 

이날짜 이규태 코너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당시 서울에서도 우연히 발견된 금덩이를 둔 실화가 적지 않다면서 ‘일사유사’에 나오는 서울 과부 김학성 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얘기를 미루어보면 당시 이같은 일이 드물게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경기도사 7권-일제강점기편’에도 나온다. 이책 제3장 제4절 ‘경기도민의 일상생활과 의식주’에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농촌지주의 기와집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이집에 대한 내용은 전통한옥 전문가인 김홍식 전 명지대 교수가 보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형적인 품(品)자 형을 지니고 있으며,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 김영백(1873~1928)이 자신의 부를 현실화시키면서 지어졌다. 그가 언제 이러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초가에 살던 김씨가 1924년 소문난 목수를 불러서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기와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사랑채의 복도, 이 집은 삼겹집 형태로 구성돼 있다. 아마도 이는 겨울의 추위에 대비한 구조인 듯하다.

 


▲안방. 다락으로 오르는 문외에 벽장을 설치해 놓았다.

 

 

별채 정자와 부엌마루 등 특이공간 눈길

이 집의 규모는 이미 높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한 대문채에서부터 느껴진다. 솟을삼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문간방들이 길게 이어진다. 문간마당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이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분의 얘기에 따르면 당초 문간마당에도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의 몸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복도를 통해 채나눔을 하고 있다.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의 왼쪽 편인 안방과 부엌, 아랫방,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건넌방까지가 안채의 공간이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가 위치한 사랑채 공간이 자리잡았다.

 

 

▲사랑채의 모습. 끝에 누마루가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은 삼겹형태에 정면 3칸 규모여서 매우 크다. 이 집을 조사했던 김홍식 교수도 ‘거의 홀에 가까운 큰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채 대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방문이나 건넌방 문이 모두 들어열개로 돼 있는 점이다. 

 

안채 공간에 들어열개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한옥이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도 기다란 형태로 매우 넓다. 안방 복도 끝에는 2층으로 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사랑채 누마루의 외부와 내부공간

 

대갓집답게 안방 부엌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특히 이곳 부엌 한쪽에는 넓은 마루공간이 설치돼 있다. 이런 형태의 부엌도 전통 사대부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나 혹은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등에 부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미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안채의 뒤뜰은 마당보다 높게 구성돼 있다. 경사진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별채형태의 정자가 서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정자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밖에서도 출입할 수 있지만, 사랑채 복도와도 연결돼 있어 사랑채로 찾아온 손님을 바로 정자로 안내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구조다.

 

 

▲사랑채 누마루의 밑 공간을 비워두었다.

 

문간마당과 몸채를 나누는 각 담장마다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쪽 담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수(守)’, ‘신(信)’, ‘교(交)’, ‘붕(朋)’이다. ‘친구와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다. 비단 이 글자들뿐만 아니라 이곳 담장에는 교훈이 될 만한 글귀들이 안팎으로 쓰여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 퇴앞으로 비상 피난통로가 설치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복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통해 안마당에서 사랑채 뒤쪽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는 커다란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옆에 역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깊이가 꽤 깊다.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이 함께 담긴 건물

한편 앞서 언급한 김홍식 교수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이 집의 사랑채는 주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사무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마름을 통한 토지경영을 했는데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마름이 직접 인천으로 가져가 거래를 한 후 현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에는 다른 지방의 대농 지주처럼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마당이 없다.

 

 

 


▲별채 정자의 내부와 외부모습. 한옥의 조형미를 물씬 느끼게 한다.

 

 

한편 이 집은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문화재 지정에 따른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소유자 측에서 해제를 요구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 측에서는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50여년전 이 집에 묵었던 사람의 회고담이 소개돼 있다. 당시 그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는데, 홀로 살며 집을 지키던 여주인이 이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일각에는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의 역사가 함께 담긴 셈이다. 어쨌든 99칸 규모의 저택이 그 규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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